#. 직장인 노모씨(27)는 지난 8월 초 직장동료들과의 광화문 근처 회식 자리에서 겪은 불쾌한 경험을 떠올리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 발단은 무심코 시킨 L사의 사이다 병 음료 때문. 당시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병따개로 뚜껑을 열고 음료수를 따랐다. 음료를 마시는 순간 그의 눈에 깨진 음료수 유리병 입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이물이 들어왔다. 해당 음료병을 살펴보니 음료 밑바닥에도 투명한 이물이 가라앉아 있는 듯 했다. 찜찜한 기분에 이미 마신 음료를 살펴보니 그 제품 또한 외관이 크게 달라보이진 않았다. 이 제품의 제조일자는 2006년으로 표기돼 있었다. 노씨는 유리조각을 먹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아직도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

#. 지난해 4월 지방의 유명 소주제조업체 M사는 국세청으로부터 주류 제조 1개월 정지 처분을 받았다. 앞서 2011년 7월과 10월 연달아 이쑤시개와 담배꽁초 등 이물질 혼입사고가 발생했기 때문. 이물질이 든 소주 제품을 마신 소비자들은 복통, 구토, 두드러기 증상을 보였으며 위장염 및 결장염 진단을 받기도 했다. 당시 이 회사는 식품의약처 조사 결과 빈병 세척 과정에서 성분 불명의 이물질을 제거하지 않은 채 병 뚜껑을 닫아 유통한 것으로 확인됐다.


음료 및 주류 등 유리병 제품에 유리조각이나 이물 등 혼입사고가 줄지 않아 소비자 안전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문제가 된 제품 대부분은 재사용 빈병으로 세척 등 관리 소홀이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다. 하지만 관련 법 규정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데다 정부부처의 ‘사후약방문식’ 관리 때문에 개선이 쉽지 않아 보인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식품 이물 신고 건수는 총 6435건으로 이 중 음료류에서 499건의 이물이 발견됐다. 음료류에서 발견된 이물은 곰팡이(166건)가 가장 많았고 벌레(87건), 유리(30건), 플라스틱(18건), 금속 등이다.

유리조각 파편의 경우 음료에 혼입되면 육안으로 식별이 어려운 데다 소비자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입 사고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실제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소비자원의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CISS)에 접수된 ‘유리병 파손으로 음료에 유리이물이 혼입된 위해사례’는 매년 30여건씩 발생, 총 129건에 달한다. 이 중 용기 내부에서 균열 또는 파손이 발생한 ‘내부 파손’은 113건(87.6%)에 달했고 유리이물을 음료와 함께 삼킨 사례는 91건(70.5%)이나 됐다.


'빈병 재사용'의 불편한 진실 아시나요

◆기준 없는 빈병 재사용
유리병 음료 및 주류에서 이 같은 이물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관리가 제대고 이뤄지지 않은 재사용 병을 주원인으로 꼽는다. 때문에 병 재사용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유리용기 제품은 빈용기보증금제도(제품가격에 빈병 가격 포함)를 채택해 재사용(세척 후 사용)하거나 오염도가 높은 병은 파쇄해 재활용되고 있다.

유리병 재사용은 자원 활용과 환경보호 측면에서 사회적 이익이 크다. 미국·독일 등 선진국들은 이미 90년대부터 관련 법규 및 제도를 만들어 유리병 재사용률을 높이고 있는 추세다. 예를 들어 독일은 ‘판트’(Pfand) 제도를 도입하고 반환기를 설치해 소비자가 빈 페트병이나 유리병을 직접 반환하고 그 자리에서 즉시 보증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빈용기에 대한 보증금은 원화 400원 정도로 국내 평균 보증금인 40원의 10배 수준이다.

재사용할 수 있는 유리병에는 바코드가 있어 재사용 횟수를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수거된 유리병은 일정한 강도 이상으로 선별돼 재사용된다.

반면 국내의 경우 빈병 재사용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이 저조한 데다 재사용에 대한 기준이나 감독 주체도 명확하지 않아 부실관리 논란이 일고 있다. 국내에서 빈병 재사용 여부는 제조사 자체 검사 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세척이나 선별 검사 기준 등도 마찬가지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다.

제조사 대부분은 세척단계에서 고온 살균 및 멸균을 위한 과정을 거치고 공병검사기 등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지만 제조사들은 대외비라는 이유로 세척 설비나 과정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피하고 있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재사용 빈병의 세척 과정 등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대외비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며 “용기순환협회에서 재사용에 관한 모든 사항을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사용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제조사마다 제각각이고 재사용 횟수를 판별할 수단이 없는 것도 문제다. 내부 파손을 야기해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유리병 강도에 대한 검사는 아예 하지도 않고 있다. 한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유리병의 강도 차는 약 15배에 달한다. 그만큼 깨질 가능성이 높은 유리병이 많을 수밖에 없다.

◆주류업계 이물사고 많은 이유

이 같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관리·감독을 해야 하는 정부기관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주류 안전관리에 관한 업무는 2010년부터 국세청에서 식약처로 이관됐다. 그러나 식약처는 시행령을 마련하지 않다가 관련 사고가 잦아지자 지난해에서야 식품위생법 안전시설을 갖추도록 하는 법 시행령을 제정·공포했다.

하지만 기존 업체들에는 정부가 2년의 유예기간을 부여해 제대로 된 단속은 힘들다. 주류업체들이 식품위생법상 식품제조가공업의 시설기준을 준수해야 할 의무는 오는 2015년 6월까지 유예된 상태다.

빈병 재사용 및 재활용에 대한  관리·감독 업무를 맡은 환경부 또한 마찬가지다. 환경부는 빈병 재사용에 대한 소비자 인식 제고 등을 위해 마련된 빈병보증금 및 취급수수료에 대한 관리 부실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환경부는 책임을 회피하는데 급급한 모양새다. 정연만 환경부차관은 지난 4월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현재의 관리 부실이 사단법인으로 운영돼온 협회 때문"이라며 "환경부 산하의 법정단체를 신설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법정단체 신설 및 취급수수료 인상 등에 대한 재활용촉진법(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 논의는 여야의 입장차로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4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